조도에 천주교 신축 예배당 건립한다.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은 다도해 지역으로 독자적 해양문화를 띄고 있는 곳으로 하조도 읍구리와 성남도에서 고대 조개무지가 1973년 무문토기와 제주도 돌로 보이는 석기도 성남도에서 발견되어 이미 석기시대부터 입도 하였음 알 수 있다.

자원발굴조사에서 하조도 읍구리에서 3기의 지석묘와 선돌이 발견되었으며, 고려고분도 확인되었고 가사도, 관사도, 관매도, 거차도 등지에서 돌칼, 돌도끼, 돌화살촉을 수습 한 바 있으며 현재 유토마을회관 앞마당에 선돌이 옮겨져 있다.

육지와 떨어진 도서지역에서 해적과 왜구로 인해서 공도 시기가 있었고 임진왜란(1598년)이후 1600년부터 해남, 진도, 영암, 영광 등지에서 선조들이 입도하기 시작했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1708년(숙종 34) 상조도와 하조도에 관방을 설치하여 그 성터가 상조도 맹성리와 하조도 읍구(고을기미, 꼴기미)리에 있었다.

제도면(조도면 전신)의 신검산, 돈대산, 대붕산 등에는 봉화터(돈대,墩臺, 조선시대 높은곳에서 동태를 살피는 초소나 군대)가 있었고 정조 이후 하조도에 세곡창고를 두어 도청리(都廳里, 세곡창고를 관리하는 도감이 있다하여 옛지명)라 하여 창리라는 지명이 유래 되었다.

신사태(신사터) 지명은 일제강점기 면소재지 창리마을 신검산(神劍山, 뾰족한 신의 검 형상, 새의 날개 형상) 자락의 갈매기머리(鷗頭山, 구두산, 노적봉, 새가 알을 품은 명당)로 일제가 지기(地氣)를 끊어 지역에서 인물들이 나서지 못하도록 봉우리를 깍아 내었다.

지맥정기를 끊기 위해 동서방향으로 칼로 베고 신작로를 놓고 1938년 신사(神社, 일본인 신성 의례 공간)를 지어 주민들을 토리로 들게하여 일본천왕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참배를 강요 하였던 곳으로 옛부터 지역 유지들의 집이 산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지역에서 선조들이 서양인들과 카톨릭을 처음 접한 것은 1816년으로 이후 카톨릭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866년(고종 3년)에 조선의 천주교 박해 중 가장 규모 큰 병인박해로 인한 병인양요가 일어난 시기부터 다.

무안 몽탄 박원기 내외가 상조도 동구리 668번지(동구공소터)로 입도하여 살면서 전교를 시작하였고 신자 장봉헌이 창유리 697번지에 초가 3칸을 건축하여 선교당으로 육지와 단절 된 곳이라서 천주교 병인박해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이후 목포 산정동 초대 프랑스신부(도예)(1898~1909)가 1898년 판공성사(判功聖事)차 제주 갔다 오다 풍랑으로 현재 성모마리아 상이 세워진 상조도 동구공소에 머물면서 1900년에 하조도 창리마을에 공소를 개설하고 카톨릭 전파가 본격화 되었다.

100년이 흐른 뒤 2002년 성유진길(아우구스티노)성당은 의신,군내,고군,조도에 있는 9개공소를 통합하여 진도진길성당으로 승격되어 이준한(토마)신부가 부임하여 조도에서 카톨릭은 현재까지 뿌리 깊게 이어지고 있다.

조도예배당이 신축 되는 곳은 신검산(神劍山) 자락의 구두산(鷗頭山) 창유리530번지로 임세춘 도감(都監, 대마도, 소마도 등 말목장을 관리 훈련하는 비상설기구, 세곡창고와 말 관리 겸하는 직책)의 불망비(不忘碑, 어떠한 인물의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기록하여 세운 비석)가 1854년 세워졌다.

이후 임도감 불망비는 사적으로 창유리 530번지에서 1960년 옛 면사무소 부지 정원으로 옮겨졌다가 어류포 선창에 있던 조도환취항기념비, 유공자비등 9기의 비석과 함께 1990년 어류포 잔등 옛발전소 부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진도진길성당 조도예배당 건립기금 계좌 농협65107951041581 (재)광주천주교회 를 통해 수년에 걸쳐 건립 기금이 조성되어 조도면 창유리 530종(10,900㎡)이 개인소유로 531종(17,387㎡)이 법인소유로, 532종(4,890㎡), 533종(1,134㎡), 560종(1,064㎡)등 9필지가 개인소유로 2024년 1월 이전이 완료되어 오는 7월 중순 착공에 들어 간다.

한편, 조도면지(鳥島面誌)(2010, 512)편찬위원회에서 조도역사나 문화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의견을 체득하여 기록하였고 진도군지(珍島郡誌)(1976, 853)에 상권 106쪽에 신검산(神劍山) 한자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836쪽에 신검산과 신금산 한글로 병기되어 있다.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옛 지명이 변경 된 우리지역에서 사례가 신사태(신사터)로 현재 지명으로 굳어져 후손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잔재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각인되어 청산 되지 못하고 있음을 기록 해 본다.

대표적 사례로 대전에 있던 호남일보사가 1933년 발행한 ‘충청남도 발전사’에 의하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5년 12월 특별열차로 부산으로 가던 중 정차한 역에서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에 ‘태전역’이라는 보고를 받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름을 바꾸라고 해라, 이제부터는 태전이 아니라 대전이다’라 하여 대전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역사적 사실이 침략자에 의해서 변형되어 기록 될 수 있기에 과장되어 지역의 전설 만들기는 경계하면서 기록물로 전해져 오는 다양한 이야기를 편견을 버리고 중립적 사고로 기록하고자 노력하며 일제 강점으로 왜곡 된 것들을 후손들이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께서는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라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고 역설 하였다.

일제 강점으로 자유를 빼앗겼던 시대 꼭 기억해야 할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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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하의도에서 김대중 발자취를 만나다.

목포, 하의도에서 김대중 발자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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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아픔의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드렸던 김대중대통령과 함께한 최경환(현 김대중평화센터 대변인)비서관이 노무현시민학교 하의도 역사탐방을 동행하였다.

노무현시민학교 이백만 교장의 진솔한 리더쉽과 시민학교 신미희 팀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준비한 오감여행 하의도 역사탐방(6.15~6.16)은 1박2일의 짧은 동행이었지만 처음 시도하는 역사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행복한 시간이였다.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김대통령의 업적인 6.15 남북선언 13주년를 맞이하고 한국인으로서 최초 평화상 수상을 기념한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개관식 참석을 시작으로 역사탐방 프로그램은 오감만족체험의 시작이였다.

정유재란때 첨병역할을 했던 고하도에서 민초들의 역사, 노적봉 그리고 이순신장군과 얽힌 이야기, 근현대사 격동의 세월 수탈의 역사를 담고 있는 국도1호선 기점,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1897년 목포항 개항과 함께 시작된 강대국 침탈의 역사를 도시 곳곳에서 고스란이 담아 내고 있었다.

목포 유달산 자락 일본 제국주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욱일승천기를 건물외벽에 치장하고 있는 옛 일본영사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주신 근현대를 살아오신 목포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김정섭소장님의 구구절절한 목포야사는 국권침탈의 유적지에서 영혼들의 상흔을 간접적으로 느낄수 있는 자리였다.

시민학교 역사탐방길에 깜짝방문하여 명사로 참여하신 박지원 의원이 들려주는 6.15 관련 된 에피소드는 남북화해의 시대속에서 김대통령 유머가 담고 있는 진솔한 남북대화는 인간 김대중의 면모를 간접적으로 느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였다.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하의도 김지곤 면장님을 비롯한 직원들의 뜻밖의 환대를 맞으며, 김대통령이 어릴적 다녔던 서당, 김대통령생가에서 추모,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관, 소금박물관, 하의도 큰바위얼굴, 최경환 비서관이 들려주는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이야기는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두사람의 인간적인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실시한 노무현시민학교 역사탐방 프로그램이 격동의 근현대사를 체험한 세대와 미래 젊은세대들과의 가교 역할을 할수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참여한 이로서 강하게 느끼고 있다.